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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촨성 지진으로 만들어진 언색호가 범람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한다. 물을 가둬 버린 둑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고. 경복궁 역 4번 출구로 나가 보니 광화문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경들과 전경버스로 막혀 있었다. 있지도 않은 시위대가 무서워 세종로 뒤의 삼청동과 효자동 길도 막아 버린 전경들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뭐가 그리 무서워 꽁꽁 숨어 있느냐고. 그렇게 막아버리면, 마치 언색호처럼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르는데.
전경들 틈 사이로 빠져 나오는 구급차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저렇게 모든 통로를 봉쇄당한 공간에서 누군가 군홧발에 밟힌 건 아닐까? 살수차의 물대포를 맞고 실신한 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을 애써 억누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전경들은 어느덧 경복궁 안의 잔디밭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광화문이 제 모습을 찾는다고 하는데, 전경들마저 20년, 3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 일사불란하게 저들의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며 궁궐에 난입한 일본 사무라이들이 비친 건 감정과잉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모든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1000-1번 버스가 한 대 있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버스기사와 경찰이 실랑이를 벌인다. 버스기사의 말인즉, 이리로 가면 저리로 가라 하고, 저리로 가면 이리로 가라하고, 길이 막혀 후진하려고 전경 한 명에게 뒤 좀 봐달라 했더니 에이 씨발 욕을 했나보다. 담당자 같은 경찰은 화난 버스기사에게 사과는 커녕 체포하겠다고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아무런 말 없이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종로를 막은 전경버스 사이에 있는 한 경찰에게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저쪽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경찰은, 저도 막 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근데 이쪽으로 가면 어차피 막혀 있어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세종로를 횡단한다. 보행자를 이렇게나 위해주는 정권에게 잠시 감사를 표하고.
감사는 잠시, 세종로 사거리를 기점으로 해서 동서로 모든 골목길을 막은 저들의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모든 길이 막혀 있었다. 아무리 권력은 공간을 분할한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물리적으로 분할할 줄이야.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들은 집에도 못가게 한다며 욕을 해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신 핸드폰과 디카를 꺼내 사진을 찍고. 하지만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인 만큼 상점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하나 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양쪽으로 출입문이 있는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가 반대편 문으로 빠져 나왔다.
물밀듯이 어디론가 향하는 행렬. 피켓과 촛불, 구호. 그리고, 사람. 텅 비어 있던 광화문 앞과는 달리방금 넘어온 이쪽 공간에는 사람이 있었다. 굳이 청와대 쪽 공간에는 저렇게나 사람이 없구나, 하고 유비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놀랄 필요는 없겠지.
그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보려고 나왔기 때문에, 한번 휩쓸려 보았다. 아이 손을 잡은 부모, 친구와 수다 떠는 청소년, 깃발을 높이 든 대학생들과 진보신당, 팔짱을 낀 연인, 전사라도 된 마냥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전경버스 창문을 깨려 하는 열혈 운동권 청년, 점잖게 양복을 빼입고 청년을 말리던 손가방을 든 신사분, 어린 애들 다치게 둘 거냐며 길을 향해 소리치던 할머니, 둥글게 모여 앉아 술판을 벌이시던 아저씨들, 신나게 꽹과리와 북을 치며 놀이마당을 벌인 젊은이들과 주위에 주저앉아 구경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다 달랐다. 버스 뒤의 저들은 모두 하나의 옷을 입고 하나의 방패를 들고 하나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그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다 달랐다. 그렇게 다른 그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들이 내는 목소리는 제각각이었고 박자도 안 맞았지만, 내용은 비슷했으니까.)
이들을 묶어주는 건 인터넷. 작은 흐름이 가상의 공간에 모여 거대한 무정형의 흐름을 형성한다. 이 변화를 정확히 예측한 들뢰즈-가타리와 자율주의자들에게 잠깐 경의를 표하고, 악성댓글을 핑계로 인터넷을 지배하려 하는 권력집단에게 다시금 사악함을 느낀다. 사실 악성댓글은 억눌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곧잘 이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가 건강하다면 인터넷도 건강하며, 반대로 사회가 썩어간다면 인터넷도 썩어간다. 따라서 인터넷이 썩어간다면 사회부터 고칠 생각을 해야지, 무턱대고 인터넷만 규제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 흐름을 규제하고 단속하는 건 조건없이 반대해야 한다.
사람들이 언제 뚫고 들어올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전경들과 달리, 사람들은 그들을 막고 서 있는 버스에 주차위반 스티커를 붙여 주고 있었다. 아아, 그렇다. 교통체증을 유발한다며 짜증을 내던 언론들은 정작 전경버스가 길을 막아 유발하는 교통체증에는 관심도 없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나서 주차 단속을 해주고 있구나.
한 사람이 전경버스의 문을 열어제꼈다. 좌석 위에 놓인 전경들의 짐이 훤히 보였다. 다른 사람이 그 짐을 꺼내려 하자 사람들이 말렸다. 뒤늦게 무전기를 들고 인상을 쓰며 황급히 달려오는 약간 높으신 분은 머쓱하게 그 옆에 서 있을 수밖에.
사람들은 전경에게 막히면 비켜라, 비켜라 외치다가 또 다른 곳으로 향하고, 외치다가 다른 곳으로 향하고, 를 반복했다. 사람들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권위를 조롱하고 있었다. 이제 이 사회에서 폭력을 사용해 권위를 세우려 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
그건 당연하다. 비록 어른들은 개념없다 욕하겠지만, 학생들은 몇 년 전부터 폭력을 사용하는 교사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반면 학생들 나름대로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해 잘 따르는 교사들도 있다. 사회는 그렇게 밑바닥에서부터 진보해 왔다. 이제는 정말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있구나. 이전부터 마음 속으로 품어왔던 권위에 대한 반항심이 작게나마 성취되었다는 작은 떨림.
그런데, 법을 지켜야 한다며 집시법은 그렇게 강조하는 윗분들은, 규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물과 소화기를 뿌려대라고 명령한다. 법도 어기고, 폭력도 저지르는 방식으로는 절대 권위를 세울 수 없을 터인데.
행렬 뒤쪽에서 꽹과리를 치며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6년 전 한창 벌였던 논쟁이 다시금 떠오른다. 월드컵 응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당시 한 선생님은 입에 거품을 물고 국가주의적인 응원행태를 비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 관념론적인 비판이었다. 유물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신체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면, 그 때 어떤 생각으로 응원을 했건 '광장으로 나온다'는 신체적 경험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 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효순-미선 촛불집회,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있었고, 건강하고 명랑한 지금의 촛불집회가 있을 수 있었다. 다시금 신체적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깨닫게 되는 계기. 그리고, 지금 저 전경들의 신체에 아로새겨질 권위주의적이며 폭력적인 경험이 새삼 안타까웠다. '비폭력'은 계속 지켜져야 한다. 저 불쌍한 전경들을 위해서라도.
소름이 돋을 만큼 즐거운 이 광경을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쉬움이 잔뜩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정권이 계속 저렇게 귀를 막고 있는 한, 사람들의 저항도 계속 될 것이기에. 언젠가 누구에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민주주의란 곧게 난 길도 멀리 돌아가는 거라고. 우리 사회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렇게 멀리 돌아가고 있다. 조급해하지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자. 나도 내가 옳다고 믿는 걸 하자.
Mr. Mouse ![]()
하지만 사회는 이미 잘 짜여져 있다. 정신지체자의 자리도 주어져 있었다. 수술 후 천재가 된 서인후는 자신의 자리에서 탈주한다. 수술받은 서인후에게 주어진 자리는 어디까지나 '실험실의 모르모트'. 서인후와 같은 처지에 있는 실험실의 '서인우'는 모르모트의 운명대로 죽는다. ![]() 바로 '개인은 이미 주어진 자리를 절대 탈주할 수 없다'라는 사실. 탈주에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제재를 받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는 사실. 이 사회에서, 개인의 탈주는 없다. I. 전통 유학에서 음악의 위치
공의 경계에서 모순나선 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반에 가깝다. 사실 상권의 모든 스토리는 모순나선을 위한 사전 포석이다. 최종보스인 아라야가 등장하고 시키, 고쿠토, 아오자키 등 주인공들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진다. 그런 만큼 이 장에 나스 키노코가 들인 공도 상당하다. 나스의 세계관이 함축돼 있으며 차후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발견된다. 제목인 모순나선은 이 장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다. 1. 주제비평 도모에: “진짜는 무엇이지?” 모순나선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엔조 도모에다. 이는 나스 키노코가 각 장마다 항상 1회용 주인공을 내세워 이야기를 진행한 탓도 있겠지만, 그 1회용 주인공들은 그 장에서 나스가 제시하는 핵심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게 된다. 도모에는 ‘진짜’를 찾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진짜를 발견할 수 없다는 독백은 현대 사회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한다. 남들보다 잘나 보이려, 남들보다 있어 보이려 하기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은 진짜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비교 대상인 ‘남들’이 없이는 그 노력도 빛을 잃기 때문이다. 도모에 역시 ‘가짜’이긴 마찬가지다. 자신이 진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달리기마저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신의 육체도 만들어진 자동 인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도모에가 가짜라는 점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해 진다. 한편 도모에가 볼 때 시키는 ‘진짜’다. 시키는 자기 자신만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필요 없는 순수한 강함을 지녔다. 시체처럼 자다가 할 일이 생겨 일어날 때가 되면 다시 소생하는 것처럼 깨어나는 시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함 그 자체다. 시키의 몸에는 근원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근원에 가까이 도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나스 키노코가 제시하는 진짜의 모습이 드러난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즉 ‘자기완결성’을 가진 존재가 바로 진짜다. 스피노자는 이를 ‘실체’라 부른다. 실체에 가까운 모습을 한 시키는 다르다. 집열쇠도 필요없다. 무엇을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자신의 소유물에 의존하고 집착하는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시키처럼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진짜가 될 수 있을까? 료우기 시키: “구멍뚫린 태극이 살아가는 법” 상권 리뷰에서도 이미 언급했듯 예전의 시키-두 시키가 공존하는 상태-는 확실히 실체라 부를만한 존재였다. 그 안에 양의를 포함하고 있는 태극이니 당연하다. 동양에서는 태극을 일컬어 만물의 이치라 한다. 스피노자의 실체와 같은 수준의 개념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키는 엄밀히 말해 실체라 할 수 없다. 태극의 한 축을 이루던 시키(織)가 죽었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상태다. “내가 나라는 실감이 없어.” 시키는 ‘허전한 구멍’이 뚫린 듯한 상태며 살인하는 것으로 그를 메우려 한다. 그러나 시키는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한다. 후지노도 키리에도 죽이지 않는다. 살인하고 싶어하지만 살인하지 않는 자인 시키. 그의 허전한 구멍은 어떻게 채워질 것인가? 모순나선 이후의 장은 언뜻 들으면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집중한다. 답은 뻔하지만 그것을 묻고 답을 추적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하권 리뷰에서 좀 더 상세히 다뤄보도록 하자.
[아아, 지금의 너라면 죽여주지]
Intro –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 모순나선의 Intro는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잘 드러낸다. 어렸을 때, 쇠붙이가 찰칵거리며 돌아가는 것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환상적인’ 믿음 때문이다. 미신이라 불러도 관계없다. 현상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러다 철이 들 무렵, 쇠붙이는 그냥 쇠붙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위 ‘과학적인’ 인식을 하게 된다. 환상은 깨지고 남는 것은 없다. 이렇게 과학적인 인식, 즉 지혜를 얻게 된 인간에게는 암울함이 대가로 돌아온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에덴 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는 행복했지만, 지혜를 상징하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에서 추방당해 비참한 삶을 연명하게 된다. 태고부터 시작된 인간의 비극인 셈이다.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 죄로 세상에서 버려진다. 중세 시대에 성경에 손을 댄 자가 처형 당했듯, 앎은 곧 죽음이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비슷한 모티브가 쓰인다. 도서관의 비밀을 풀려 하는 자는 호르헤 수도사의 칼을 받게 된다. ‘공의 경계’의 마술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근원의 소용돌이에 닿으려 노력하지만 항상 억지력이 발동해 그들을 제거한다. 모순나선 – 모순의 Motive들 미키야와 토우코는 운전면허를 놓고 벌이는 대화에서 현대 사회의 모순을 지적한다. 운전을 배우고, 그 이후 자격증을 얻는 것일까, 자격증이 있기 때문에 운전을 배우는 것일까? 마치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놓고 싸우는 듯한 물음이다. (아마도 이 경우는 국가의 통제수단으로서 ‘자격증’이 등장했다고 보는 쪽이 옳은 듯 하지만.) 앞서 환상과 지혜를 놓고 벌어지는 마술사의 문제는 이제 한 걸음 더 나간다. 억지력을 이겨내고 근원의 소용돌이에 닿은 후의 일이다. 토우코는 모든 마술사들의 소망인 ‘근원의 소용돌이’에 닿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근본적 모순에 무릎을 꿇었다고 고백한다. 바로 근원의 소용돌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을 버려야 하지만, 이성 없이는 인식할 수도 없다는 모순. 서양철학에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던 사실 세계와 인식 세계의 괴리다. 칸트는 인식 세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간극을 해결하려 했고, 그 이후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위로 눈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모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모순나선은 이런 모순으로 가득찬 장이다. 아라야는 자기 입으로 모든 죽음을 64종류로 구분했다고 한다. 죽음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근원의 소용돌이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아라야를 위해 매일 태어났다 죽는 것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산 사람’인가, ‘죽은 사람’인가? 도모에는 ‘삶과 죽음의 반복’이라는 풀리지 않는 모순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시키를 구하러 잠입한 도모에가 본 것은 더욱 큰 모순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뇌를 볼 때 드는 감정은 무엇일까? 정신은 분명 도모에 자신의 것일 텐데 육체는 삐걱대는 자동인형이라면 그것은 인간인가, 기계인가? 어떤 쪽이 진짜 도모에일까? 자동인형인 육체 쪽인가, 양수 속에 둥둥 떠 있는 뇌 쪽인가? 나선, 모순의 통합 – 근대 vs 현대, 아라야 vs 토우코 계속되는 모순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헤겔에게 모순은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것, 그래서 발전시켜야 할 것의 의미를 갖는다. 모순된 두 개념은 상위의 개념 안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러나 그 상위의 개념에도 모순은 있다. 그 모순은 다시 더 상위의 개념으로 통합된다. 마치 회전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나선의 모습처럼. ‘모순나선’의 등장이다. 모순나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역시 아라야의 맨션이다. 동동과 서동이 태극의 모습으로 서로 얽혀 있으며 중심의 엘리베이터는 나선형을 이루며 올라간다. 같은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과 살아 있는 사람들-정확히는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이 있다. 이들의 모순된 존재는 맨션, 즉 아라야의 신체 안에서 극복된다. 덧없어 보이는 삶과 죽음은 근원의 소용돌이에 닿으려는 아라야의 노력의 근간을 이룬다. 아라야의 모순나선은 플라톤을 닮았다. 나선의 맨 위에는 근원의 소용돌이, 즉 이데아가 존재한다. 나선 아랫부분에 있는 모순들을 극복해 근원의 소용돌이로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셀 수 없는 죽음들을 수집해 분류하고 개념으로 묶어 최종적으로 하나의 무엇에 도달하려 한다. 토우코는 이런 아라야의 노력을 보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한탄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아라야’라는 이름의 자신이 ‘아라야식’이라는 집합무의식을 거스르려는 데에서 오는 모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라야처럼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근원의 소용돌이에 닿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아라야의 방법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특징 별로 분류해 나가다 보면 ‘사람’이라는 개념을 찾을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후에 남는 것은 ‘사람’이라는 개념뿐이지 근원적인 무엇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라야의 방법을 따른다면 ‘죽음’이라는 개념만 남게 될 뿐이다. 근원의 소용돌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토우코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는 좀 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모순을 극복하려 한다. 언제부터 자신의 몸을 대체했는지 모를 수많은 인형들. 하나의 인형이 죽으면 다음 인형이 자리를 대체한다. ‘그것들 모두’ 아오자키 토우코다. 굳이 인형들을 분류해 개념을 찾을 필요는 없다. ‘아오자키 토우코’의 개념 없이도 아오자키 토우코는 모순 없이 존재할 수 있다. 앞서 ‘모순의 모티브’에서 던졌던 모순처럼 보이는 질문들은 모두 ‘진짜’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하지만 ‘진짜’의 개념은 무수한 상사 속에서 그 의미를 잃는다. 진품과 복제가 경계를 잃는 순간 – 상사들의 놀이가 시작된다. 무수한 토우코들이 저마다 토우코임을 주장하며, 그들 모두 토우코다. 뇌와 육체가 분리된 도모에도 마찬가지. 뇌와 육체 모두 도모에다. 무엇이 진짜인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두 마술사와 시키가 펼치는 세 갈래의 모순나선]
마치며 삶의 의미를 묻는 ‘진짜’에 대한 질문이 더 이상 필요 없다면, 어떤 의문이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나스는 그 답을 위해 다시 한 번 도모에를 빌린다. 아무리 가짜라 폄하되는 자라 해도 의미가 없는 삶은 없다. 도모에가 아라야에게 가한 일격은 별 쓸모 없어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시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고, 아라야의 파멸을 불렀다. 무릎을 껴안고 손톱을 깨물며 끝이 없는 문답을 하는 도모에는 분명 쓸모 없다. 하지만 칼을 들고 아라야에게 돌진하는 순간, 도모에의 삶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직접 행동으로 보이는 만큼 자신의 삶의 의미도 확보된다는 뜻일 게다. 모순나선의 끝에 나타나는 시키는 이를 확실히 드러낸다. 얼굴을 붉히며 미키야에게 열쇠를 요구하는 시키는 사적 소유물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의 모습이 아니라 수천, 수만 명에 이르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나스가 제시하는 허전한 구멍을 메우는 방식이며 삶의 의미를 찾는 방식이다. 2. 다른 것들 아그리파의 직계 토우코의 별명을 잘못 불렀다 살해당하는 비운의 마술사 아르바 코르넬리우스. 이 자를 가리켜 아그리파의 직계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조각상으로 유명한 아그리파는 로마의 장군일 텐데,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나스가 언급한 아그리파는 중세 시대의 카발리스트로 유명한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이다. 연금술사로 유명한 파라켈수스와 함께 16세기 마술계의 쌍벽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악마를 소환하는 소환술사로 유명하다. 아넨엘베의 꿈 모든 것이 끝나고 시키는 꿈을 꾼다. 아넨엘베라는 카페에서 도모에와 같은 외양을 지닌 10대 남자와 등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꿈. 둘은 각각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두 사람, 그러나 향하는 출구는 반대 방향이다. 『Fate/Hollow Ataraxia』를 플레이 한 유저라면 눈치챘겠지만, H/A의 클라이막스도 같은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 모든 사건이 해결된 뒤, 두 주인공이 등을 마주하고 있다가 각자의 반대쪽으로 향하는 것. 새로운 미래로 출발하는 여자 주인공,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은 후 현실 세계를 떠나는 남자 주인공. 함께 했던 기억의 경험을 뒤로 하고 각자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모티브는 반복되면 질리기 마련. 이제 새로운 엔딩을 준비할 때도 됐다고, 나스 씨. 이외에도 뇌수를 보관한 방을 미리 그려내는 도모에의 ‘꿈’도 뒤이은 작품들에서 암시의 장치로 계속 쓰이고 있으며,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독백에 가까운 과거 회상이나 전지적 작가의 개입이 이뤄지는 것도 식상하다. 이렇게 독자들을 일일이 밥을 퍼먹여 줘야 하는 존재로만 치부하면 곤란하다. 그만큼 작품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아넨엘베의 하루'의 이미지. 세이버와 알퀘이드, 그리고 빨간 코트의 시키가 보인다]
모순나선은 ‘근원’이라는 나스 키노코의 개념을 잘 설명하는 장이다. 나스는 「 」라는 기호로 근원을 나타낸다. 세상의 근본이면서도 문자나 기호로 나타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강조하는 실재계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개념은 스피노자의 실체다. 스피노자는 실체, 속성, 양태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한다. 실체에서 ‘정신’, ‘신체’ 등의 속성이 파생되며 이것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양태다. 나스는 이 개념을 빌려 실체에는 ‘근원’을, 속성에는 ‘기원’을 대응시킨다. 「 」에서 존재의 기원이 되는 속성들이 갈려 나온다. 도모에의 기원은 ‘허무’, 아라야의 기원은 ‘정지’라는 식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개체가 형성되기까지 기원도 수많은 양태들로 갈려 나간다. 그래서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기원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반면 기원을 각성한 사람은 그에 해당하는 힘을 얻지만 그 기원에 속박되기 마련이다. 아라야는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멈추는 결계의 능력을 얻지만 그의 최후는 빈사상태에 빠진 시키도 손에 넣지 못하는 ‘정지된 몸’이었다. 하권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시라즈미 리오도 마찬가지로 기원을 각성해 거기에 속박된 사례에 속한다. 드물게도 시키는 근원-기원-양태의 선에서 벗어난 인간이다. 시키의 신체는 근원에서 시키로 직접 이어지는 ‘근원과 연결된 몸’이다. 료우기 가문의 장난질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터다. 아라야가 시키의 신체를 손에 넣고 싶어하는 것도 근원과 직접 연결된 몸을 통해 근원에 도달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최후의 마법 –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 아자카는 미키야에게 마법과 마술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다. 마법은 현재 인류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며, 마술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것을 신비로 이루는 힘이라고 한다. 과학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마법의 영역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 미키야는 이를 듣고 “최후의 마법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라고 반문한다. 아자카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Fate/Stay Night』의 시로가 항상 되뇌이는 말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꿈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계기가 되어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돈, 명예, 권력… 이런 게 꿈이라면 뭔가 낭만적이지 못하다. 언젠가 이룰 수 있는 것은 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오히려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으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삶은 빛나지 않을까?
『空의 境界-上』Review / written by 베르쨩(ghnk99@naver.com)
* 본 리뷰는 나스 키노코의 『空의 境界』를 모두 읽은 독자를 대상으로 쓰여졌습니다. * 본 리뷰를 타 사이트로 옮기는 것은 자유지만, 출처(http://tenshino13.egloos.com)와 옮기는 사이트, 필자 ‘베르쨩’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쪽지나 댓글 등으로 알려 주시면 감사. I. 들어가며 『空의 境界』는 일본의 동인서클 [Type Moon]의 시나리오 담당 나스 키노코가 1997~1999년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을 바탕으로, 2001년 12월 정식 출간된 소설이다. 『月姬』와 『Fate』시리즈의 모티브가 되는 작품이며,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닮아있다. 본 리뷰는 『空의 境界』 중 상권 4개 장,「부감풍경」, 「살인고찰」,「통각잔류」,「가람의 동」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하권에 대한 리뷰는 차후 집필할 예정이다. ![]() [『공의 경계』 주인공 료우기 시키] II. 『空의 境界-上』사건 순서 - 사건 순서 1995년 4월, 시키와 미키야의 만남 「살인고찰」 1996년 3월, 시키가 사고 당한 후 입원 「살인고찰」 1998년 6월, 시키 회복 「가람의 동」 1998년 7월, 시키와 후지노의 만남 「통각잔류」 1998년 8월, 시키와 키리에의 만남 「부감풍경」 III. 주제파악: Self, Other, and Life 1) 자아(Self)의 구성 나스 키노코는 사회적 개념의 ‘자아’에서 어긋난, ‘경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사회적 자아에 대해 고민한다. 그가 내세우는 사회적 자아의 구성요건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 기억, 그리고 자아구성 우리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것이 바로 ‘기억’이다. 우리는 어떻게 지난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空의 境界』의 주인공 시키는 부분적 기억상실을 가진 데다가 자신이 가진 기억, 즉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경계인’이다. 마치 영화를 보고 따라하는 것처럼 기억을 되살려 그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행동의 자신의 것이라는 실감은 없다. 시키의 이러한 불일치는 자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가람의 동」에서 유령에게 몸을 내주려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반성인지, 토우코에게 들은 말 때문인지, 시키는 자신의 죽음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곳으로 다시 떨어지는 것만은 싫어!”라며 삶의 의지를 되찾는 시키. 시키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은 굳은 ‘자기’라는 개념 없이 사회에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자기를 연결하는 실이 끊어지면서, 이제 존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홀로 서 있는 시키 뿐이다. 토우코의 말을 빌자면 ‘텅 빈 곳’이나 다름없다. 시키에게 ‘生의 실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살인’이다. 그러나 시키의 말과는 달리, 그리고 키노코의 서술과는 달리, 시키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희열을 느낀다. 사체를 마주한 병원에서의 시키, 폭풍우가 몰아치는 다리에서 한쪽 팔을 잃은 시키. 시키는 자기 자신을 죽음의 공간에 내던지는 것을 통해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실감을 얻는 것이다. 시키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 사람이 바로 미키야. 시키는 미키야의 존재 때문에 경계의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새로운 자아를 구성해 나갈 수 있다. 토우코가 말하는 ‘텅 빈 곳을 채워가는 것’은 이를 의미한다. 처음부터 구성되는 새로운 자아, 시키는 경계인들 중 가장 축복받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스 키노코는 시키라는 인물을 통해 기억에서 단절된 인간이 어떻게 자아 구성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실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空의 境界』에서도 그렇고, 이후 작품에서도 보이듯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언제나 주변 인물과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 이런 해답이 가장 옳은 말인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진부하다. 등장 인물을 경계의 극한까지 밀어붙였다면, 보다 실험적인 구상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 시선, 그리고 자아구성 시각은 인간이 가진 오감 중 가장 강렬하다고 한다. 그만큼 ‘보다’라는 행위로 주위를 인식하는 것은 다른 행위로 주위를 인식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空의 境界』의 처음에 등장해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장(章), 「부감풍경」은 시선을 통한 자아구성을 다룬다. 부감(俯瞰)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을 일컫는 한자어다. 앞서 두 가지 다른 자아구성에 대한 실험이 기억과 감각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평범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시점, 즉 이 세계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자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실험이다. 나스 키노코는 토우코의 입을 빌려 ‘신의 시점’을 가지게 된 인간은 삶에 대한 실감을 잃어 버리고 타나토스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래 타나토스는 프로이트 후기 저작인『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제시된 개념이다. 후기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Id)은 성적 욕망 이외에도 비유기체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며 이원적 욕망 이론을 주창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타나토스는 원래의 개념과는 다르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아쉬운 면이지만, 나스 키노코가 설정한 문제틀은 계속 유효하다. 메를로-퐁티는 사회에서 타자들과의 공존을 중요시하면서 수많은 의식들의 상호 응시 속에 자아와 타자는 서로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된다고 말한다. ‘자아’의 형성에는 타자의 ‘시선’이 필수적임을 드러내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인과의 대립으로 ‘자아’라는 동질적 유기체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나아가 익명적이며 개인에 앞선 실존이 ‘자기’와 ‘타자’의 신체에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자아와 타자의 상호성이 자아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키리에의 경우, 토우코의 말처럼 세계 전체를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으로는 삶에 대한 실감을 얻을 수 없다. 자아를 보장해 줄 타자와의 소통, 시선 교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키리에가 계속해서 8명의 비행소녀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낸 것이나, 미키야의 꿈 속에서 미키야를 유혹하려 한 것은 자아구성을 위한 노력이었다. “혼자서는 외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는 고백은 타자의 필요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사이다. 2) 타자(Other)의 필요 나스 키노코는 ‘시선’에 대한 실험을 통해 자아구성의 필수요소로 ‘타자’를 등장시킨다. 이에 대한 좀 더 세련된 실험을 위해 나스 키노코가 등장시키는 것은 역시 주인공인 시키다. 나스 키노코는 우선 실험의 출발점으로 타자를 필요치 않는 존재로서의 자아를 상정한다. 그것이 바로 료우기(兩儀). ![]() [날카로운 눈의 소유자, 료우기 시키] - 료우기, 완성된 실체 태극이 그 자체로 두 가지 다른 속성을 포함한 것처럼, 료우기는 그 안에 자아와 타자, 시키(式)와 시키(織)를 포함하고 있다. (편의상 두 시키를 아울러 언급할 때는 ‘료우기’로 부르기로 하자.)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한자, 같은 신체지만 다른 성격. 앞서 보듯 자아의 구성에는 타자의 시선이 필수이며, 실존은 ‘자기’와 ‘타인’의 신체에 걸쳐 존재한다고 하지만, 료우기의 경우는 하나의 신체 안에 자아와 타자가 공존하며, 이미-구성된 자아로 그 실존이 하나의 신체에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료우기가 고등학교에 올라올 때까지 시종일관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 그는 타인과 어울릴 필요가 없었다 – 이물질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나스 키노코는 완성된, 그러나 고립된 자아로부터 출발한다. 안노 히데야키가 불완전한 자아부터 출발한 것과는 상반된 실험이다. 완성품 료우기를 실험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은 바로 순진무구한 청년 미키야다. 미키야는 계속해서 료우기에게 접근한다. (현실에서는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료우기에게 거부감과 방어본능을 불러온다. 이는 마치 ‘알’과 같은 상황이다. 알껍질 안에 들어있는 흰자와 노른자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상태인데, 누군가 그 알껍질을 깨려고 하는.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처럼, 껍질을 깨지 않으면 새는 날 수 없다. 알껍질을 깨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껍질 안의 노른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료우기는 갈등한다. 미키야를 죽이고 싶어하는 충동은 유일실체로서의 료우기를 지키려는 본능의 발현이다. 결국 비가 내리는 새벽, 빨간 홑옷을 걸친 시키는 미키야에게 나이프를 들이댄다. -상상계와 상징계 시간은 어느덧 2년을 훌쩍 넘기고, 비가 내리던 날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남은 것은 시키(織)을 잃은 채 혼자 남은 시키(式) 뿐. 이제 시키는 더 이상 료우기가 아니다. 라캉은 현실을 그 유명한 실재계/상상계/상징계의 3단계로 구분한다. 라캉의 상상계는 흔히 ‘거울단계’로 알려져 있다. 상상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인식하는 영역이다. 여기에서 자아와 타자(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이다. 이 영역에서 차이나 구별은 없으며, 두 항(자아와 타자)은 보완적인 관계이다. 라캉의 예에서 보이는 ‘엄마와 아이’, 혹은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두 항의 관계만으로 조화로운 총체를 이룬다. 각 항은 다른 항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채워준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야.” 이러한 라캉의 정의에 따르면, 료우기는 정확히 상상계의 인간이다. 시키(式)와 시키(織)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인 두 다른 항이다. 두 시키는 보완적인 관계에 있으며, 이 두 항만으로도 완성된 자아, 조화로운 총체를 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항, 타자는 필요치 않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며 혼자 놀 듯, 각각의 시키는 서로 다른 시키를 보며 홀로 존재한다. 어린아이가 사회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거울 앞에서 벗어나야 하듯, 시키의 성장을 위해 나스 키노코는 시키(織)를 제거한다. 이제 남은 건 깨어진 거울 앞의 어린아이, 시키(式) 뿐이다. 라캉의 상징계는 상상계와 매우 다른 영역이다. 상상계의 조화로운 관계와 달리 상징계의 관계는 ‘차이’를 기반으로 한다. 상상계에서는 A와 A’가 있을 뿐이지만, 상징계에서는 A는 B가 아니기 때문에 A이며, B 역시 C가 아니기 때문에 B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지시하는 것은 기호이며, A는 ‘A’라 말하고, B는 ‘B’라 말하기 때문에 각각 상징계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기호는 상징계에서 관계를 맺는 매개체이다. 상징계 내의 자아는 상상계의 자아처럼 자아의 이미지와 노는 대신, 다른 사람들과 놀아야만 한다. 이 영역에서도 각 항은 저마다 결핍을 안고 있으며, 다른 항에서 결핍을 채우려 한다. 하지만 ‘나와 나의 이미지’라는 상상계의 즉각적 이항관계 대신, 상징계에서는 ‘A-기호-기호-B’라는, 기호를 통한 간접적 삼항관계만이 가능하다. 즉 각 항은 다른 항으로부터 직접 결핍을 채울 수 없다. 아이는 커 버렸고, 이제 사회생활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시키는 이제 타인인 미키야에게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시키(織)에게 받은 것처럼 완전한 결핍해소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 그것이 ‘인간’의 조건. 토우코는 시키에게 자신의 텅 빈 곳을 발견하라고 충고한 후, 돌아서서 중얼거린다. “이런 부러운 녀석…” 비록 시키는 그 동안 자기를 비추던 거울이 깨어져 버려 자기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상을 잃어버렸지만, 이제 ‘인간’이 되는, 상징계로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길이 지옥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알껍질은 깨졌고, 아프락사스는 막 그 날개를 펴려 하고 있다. 3) 삶은 그 자리에 자아를 구성하고, 자아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끌어내면서 타인과 마주서게 한 나스 키노코. 다음 문제는 이제 타인과 마주선 자아들이 어떻게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지에 대한 것이다. 즉, ‘삶’의 구성방식에 대한 실험이 이어진다. - 도덕/충동 각각 다른 많은 수의 인간들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도덕’이라는 규율이 필요하다. 법은 의식의 층위에서 인간을 강제하지만, 도덕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인간을 규제하는, 보다 강력하고 근본적인 구속 수단이다. 나스 키노코가 『空의 境界』에서 다루는 도덕은 주로 살인에 관한 것이다. 살인금지의 규율은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다. 하지만 살인욕구 역시 오래된 인간의 충동이다. 결국 살인에 관한 도덕적 문제는 필연적으로 도덕과 충동의 경계에서 발생하게 된다. 『空의 境界』의 경계인들은 모두 이 기본적 도덕의 경계에 서 있지만, 특히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아사가미 후지노이다. 이미 잘 알려진 프로이트의 자아구성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무의식(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의 3단계로 나뉜다고 한다. 무의식은 원초적인 욕망이 주를 이루며, 초자아는 도덕적 명령의 반영이다. 자아는 무의식과 초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후지노에게는 균형을 이루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은 나쁜 행위다’라는 정언명령적인 도덕률을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정작 피바다에서 미소를 짓는 후지노의 안에는 초자아와 무의식, 즉 도덕과 충동만이 존재한다. 즉 후지노는 도덕과 충동이 상충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이후 작품인 『Fate/Stay Night』의 사쿠라에서도 같은 설정이 반복되지만, 후지노는 극한으로 내몰려 결국 살인을 하기에 이른다. 도덕과 충동이 공존하는 후지노의 내면에서는 이 살인 행위를 두고 격전이 벌어진다. 통각을 되찾을 때마다 일어나는 살인, 그리고 그것을 규제하려는 도덕적 초자아. 나스 키노코는 살인자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 가두는 것을 택했다. 후지노는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절대자-법제정자의 위치에 서 있는 시키는 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 [통각잔류, 아사가미 후지노] - 죄, 벌, 그리고 용서: 상대에 대한 이해 그리스 신화에서 이오는 제우스와 동침했다는 이유로 헤라의 분노를 사 큰 벌을 받게 된다. 이오가 제우스를 유혹한 것도 아니고, 이오는 단지 신적인 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어째서 헤라의 분노는 제우스가 아니라 이오에게 가는 걸까, 하며 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터다. 살인죄를 저지른 후지노, 그리고 이를 단죄하기 위해 나타난 시키. 소설은 서로의 이유를 그럴 듯 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본질은 죄를 범한 인간과 단죄자의 대결이다. 폭주한 모습까지도 사쿠라를 닮은 후지노는 시키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인간은 운명을 꺾을 수 없는 것이 숙명. 후지노는 결국 시키에게 능력을 제압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나스 키노코는 죄를 범한 가련한 여인을 용서한다. (이 ‘용서’의 모티브 역시 이후 작품에서 계속 등장하게 된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스스로에게 지우는 무거운 짐, 그것이 벌이야.” 미키야의 대사는 ‘외부’에 의한 벌에 익숙한 우리에게 매우 새롭게 다가온다. 자의가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죄의 책임은 스스로에게 묻는 것. 이런 용서가 전제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다. 상대의 처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상대가 느낄 양심적인 고통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용서’라는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 사회는 특히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사회다. 버스기사는 과천방면 정류장에 서 있지 않은 승객을 탓하고, 승객들은 초록버스 정류장에 서지 않는 버스기사를 탓한다. 하나의 게임을 놓고 야겜이다, 문학이다, 하는 소모적 논쟁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서로를 ‘개념없다’라며 깎아내리기에 급급하지만 정작 왜 그런지는 아무도 속시원히 말하지 않는다. 동정심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인이라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미키야, 시키(월희), 시로. “사쿠라는 걸레라 싫어요”라는 말을 생각없이 내뱉는 플레이어들이 이들을 보며 조금은 ‘타인과 같이 사는 삶’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IV. 뒤집어 보기 1) 후죠 빌딩의 시간 「부감풍경」은 대충 읽으면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뭉뚱그려진 텍스트이다. (나스 키노코 특유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읽어 보면 사건을 따라갈 수 있다. 키리에는 소렌에게 제2의 육신을 얻은 후부터 계속 후죠 빌딩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나스 키노코는 평범한 인간들 중에도 ‘비행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설정을 내세운다. 키리에는 실제로, 혹은 꿈에서 비행하는 소녀들을 불러들여 외로움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키리에를 알아보지 못했고, 키리에는 그들에게 자신을 인식시키려 했지만 비행하는 소녀들은 키리에를 인식하는 순간 비행능력을 잃고 떨어져 ‘추락사’ 혹은 ‘자살’로 판명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후죠 빌딩에서 시키가 본 것은 무엇인가? ‘후죠’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빌딩은 평범한 빌딩이 아니다. 빌딩의 시간축은 다른 세계와 비교했을 때 미묘하게 비틀려 있어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따라서 시키가 본 비행소녀 8명의 환영은 이미 죽거나 죽을 아이들의 모습이다. ‘후죠 빌딩’이라는 ‘환경’이 비행소녀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2) 결계가 쳐진 병원 시키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는 어째서 결계가 쳐져 있던 걸까. 누가, 무엇을 위해 병원에 결계를 친 것일까. 해답은 「가람의 동」 텍스트의 행간에 숨어있다. 「가람의 동」에 등장하는 간호사들의 대화로 볼 때, 소렌은 이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 토우코의 대사로 짐작컨대 결계의 목표는 당연히 방해를 받지 않고 시키의 몸을 얻는 것이었을 터이다. 병원에 들어온 시간은 2년 전 시키가 입원했을 당시로 추정되며, 아마도 시키가 회복한 직후에 병원을 나갔다 – 시키의 몸을 얻은 이후의 작업을 위해서일 것이다. 소렌은 병원을 나가기 전에 이미 사령과 사자를 조종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나갔다. 단 하나, 토우코가 시키를 보러 올 것이라는 예측은 하지 못한 게 그의 패인이었다. 소설에서 후지노의 모습은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초자아와 무의식이 번갈아 나타나는데, 이 때 초자아와 무의식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통각’이다. 감각을 되찾은 후지노가 살인광이 되는 것 – 바로 살인충동의 무의식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어진 후지노는 초자아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이다 –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 “더 이상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머니처럼 정숙한 여자로, 아버지가 자랑할만한 우등생으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만한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평소의 무감각한 후지노는 도덕적 명령, 즉 초자아에 복종할 뿐으로 무의식의 충동은 완벽히 억압된 상태이다. 시키가 후지노를 죽일 마음이 들지 않을 때는 후지노가 초자아 상태가 될 때이며, 이 상태의 후지노는 시키에게 生의 실감을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을 잃어버린 후지노에게 다시 감각을 되찾게 해 준 사람은 바로 소렌이며, 그의 행동은 하권에 나오듯 시키의 몸을 차지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 [가람의 동, 깨어난 시키] 3) 채널과 의사소통 미키야는 후지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초능력을 연구하는 박사를 찾아간다. 미키야는 박사에게서 초능력을 TV 채널에 비교한 강의를 듣다가 서둘러 자리를 뜬다. 여기서 나스 키노코가 쓰는 ‘채널’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인식형식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템플 그랜딘은 자폐증을 극복한 동물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저서 『Thinking in pictures』에서 자신의 사고체계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다. 그랜딘은 보통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사고와는 다른 시각적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다. 언어와 감정이 융합되어 있는 언어적 사고에 비해, 그랜딘은 언어와 사물에 대한 이미지가 따로 작동하는, 언어를 사용해 뇌 속에 저장된 시각적 이미지를 불러내는 시각적 사고를 한다. 후지노의 경우, 무통증이 되기 전까지의 행동과 사고체계로 정상인처럼 살아가지만 통증이 제거된 상태에서 점차 감정이 없어져 가고 어떠한 일에도 무감동한 인간이 되어 버린다. 만들어진 자폐아 - 통증이 없을 때에는 무감동한 인간, 통증이 생길 때에는 광기에 가득찬 살인마로 변신한다. 토우코가 "그 아이는 이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추적한다. 보통 광인은 격리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지만, 푸코의 작업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 광인들은 신의 말을 전하는 자, 예술가, 권력을 조롱하는 자로 사회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누구도 광인을 축출해야 할 무서운 대상으로 보는 이는 없었다. 광인들이 격리된 것은 중세 말, 계몽주의 시대 때부터이다. '이성'에 의한 단일한 지배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비이성'을 배척하는 과정이 바로 광인들을 격리수용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계몽주의자들에게 광인들은 계도해야 할 대상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사회에서 축출해 버려야 하는 암적인 존재였다. (똑같은 생각이 나스 키노코의 성당교회에서 나타난다. 『월희』에서 처음 등장하는 성당교회는 자신들의 믿음에 상반된 존재-흡혈귀-를 세상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조연으로 나오는 '김범'이라는 아이가 있다.
이순재 가족의 집에 눌러앉아 살다시피 하는, 기생충 같은 존재다. 모두들 범이의 존재를 당연히 여기고, 범이도 이씨 집안에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얼마 전, 범이는 이씨 집안의 손자이자 친구인 민호의 여자친구에게 손을 댔다 걸린다. 집단린치에 가까운 구박을 받는다. 민호가 범이를 감싸고 돌아도 소용없다. 너무 심한 구박에 범이는 "나도 서운했던 것 있다"며 큰소리 친다. 범이가 서운했던 것은 할머니 생일잔치에 초대 안 한 것, 가족사진 찍는데 연락 안 한 것 등이다. 이씨 집안 식구들은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닌데 왜 그래야 하느냐"며 어이없어 한다. 아마 시청자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을 거다. 하지만 범이의 한 마디, "저는 제가 이 집안 식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그렇다. 이씨 집안 사람들은 물론 시청자들까지 "가족이란 혼인관계와 핏줄로 연결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다면 입양자녀가 있는 가정은 가족이 아닌가?) '개념'은 정하기 나름이고 항상 변화한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한국사회'에 외국인이 섞여들어온지도 오래 됐다. 이제 낯설지도 않다. (마치 이씨 집안 식구들이 범이를 대하듯) 하지만 외국인은 한국인이 아니다. 국적을 취득해도 마찬가지다. '핏줄'이 다르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인식을 위한 집단의 구분과 추상화는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다. 하지만 그 구분이 고착된 개념으로 변하는 것은 본성이 아니다. 온갖 구박을 견뎌내며, 꿋꿋이 '가족'의 개념은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범이에게,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된 다문화주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빚을 지고 있다. 다시 한 번, '가족'은 물론, 모든 개념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남자'와 '여자'도, '흑인', '황인종', '백인'도, '군입대의 의무'도, '종교의 자유'도, 모두모두... 완전히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의 역겨운 '가장된 차이'를 벗어던지고 근본적인 변화를 인정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어디에선가의 인턴사원 생활로 매우 바쁩니다 ^^;
하지만 지난주부터 아직 끝내지 못한 공의 경계 리뷰를 위해 다시 책을 손에 잡았습니다. 이제 '모순나선' 장의 상권 부분을 모두 끝내고 하권으로 돌입했습니다. 아직 클리어 하지 못한 '라이크 라이프'라는 녀석도 주위에서 들어보니 건드려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다음 리뷰의 대상으로 생각 중입니다 :) 시기는 한 5~6월 쯤이 되겠네요. 샤샤샥... ![]()
[유럽여행 3일만에 카메라를 부숴버리고, 새로 산 카메라로 깨작깨작 장난치다가 '날짜 삽입' 메뉴를 On으로 켜놓는 우를 범한 사진] 한국 사람들에게 유명한 '몽생미셸'. 바다 한가운데 솟아있는 수도원이다. 바닷가여서 그런지 바람이 매우 강하다. 이 수도원을 처음 지으려고 마음 먹은 사람은 꿈에서 계시를 받고 수도원 건축구상에 들어갔다고 한다. 참 세상에는 제대로 미친 사람이 많다. 하지만 역사는 바다 한가운데 수도원을 건축하느라 피와 땀을 쏟았을 평범한 사람보다는 꿈을 핑계삼아 망상을 실제로 구현한 미친 사람을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당시 있었을 법한, 사람들의 지치고 피곤한 일상은 생각지 못한 채 그저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다. 교활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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